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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사고로 오른팔을 잃은 외팔 구두장이, 남궁정부씨
“장애인용 구두가 있다는 걸 아시나요? ”
지하철 사고로 오른팔을 잃었습니다.
한평생 구두장이로 살았던 삶이 막막해져 왔습니다.
생계를 잇게 해준 팔을 잃었으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열흘 만에 퇴원했습니다.
‘한 때 구두 장이였으나 이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린 자신이
말할 수 없이 초라했습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장애인용 구두’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살기 위해, 장애인 구두를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도전했습니다.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발이 불편한 장애인을 위해 맞춤 구두 5만여 켤레를 만든
구두장이 남궁정부 씨의 이야기입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는 남궁정부 씨,
2000년 신지식인으로 선정되기도 한, 그의 인생 얘기
함께 들어봅니다.
◇ 서로의 지체가 되어 오른 히말라야 해발 4,700m
▶ 칠순이 다가오는 연세로 올해 4월에 히말라야에 다녀오셨다고 들었어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요. (웃음)
히말라야 칸진리봉, 해발 4,700m를 다녀왔어요.
절단 장애인 7명, 혼혈인 7명, 사랑의 밥차에서 연예인 7명, 봉사자 분들과 스태프진
해서 37명이 다녀왔어요.
▶ 다리가 없으신 분들은 어떻게 올라가셨나요?
목표를 정했으면 꼭 가야 한다는 긍지를 가지고 주위에 함께 간 연예인이나 봉사자 분
들이 보듬고 가기 때문에 힘은 들어도 갔다 올 수가 있었어요.
▶ 해발 3,000m가 넘어가면 고산증이 온다고 들었어요.
네팔의 대사관님이 그곳에서는 해발 3,000m도 안 되는 산은 이름도 없다고 하더라고
요. (웃음) 하루에 8-10시간을 걸었는데 저는 크게 고생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예행
산행 없이 간 다른 분들은 발이 부르터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 어떤 것이 제일 어려우셨어요?
하루, 이틀이 아닌 사흘 나흘을 가다 보면 중간 중간 산에서 자야 하는데 어두워서 눈
앞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어요. 저도 장애를 갖기 전에는 장애를 가진 분들의 심정을
전혀 몰랐는데 이제는 철이 들었는지 어둠 속에서 시각장애인의 어려움을 알겠더라고요.
▶ 그곳에선 별이 주먹만 하다면서요?
공기가 좋으니까 크게 보일 뿐이겠죠. 끝까지 올라가는 우리 장애인들의 의지와 긍지
가 별보다 더 빛나고 나중에는 참 많이 울었습니다.
▶ 지금도 계속 구두를 만들고 계신데 여태까지 만든 구두가 5만여 켤레가 넘는다면서
요?
장애인 구두로서는 그 정도가 되고 어려서부터 했으니 일반구두까지 합치면 훨씬 많겠
죠.
◇ 내 발로 땅을 딛는 기쁨을 선물해 주고파
▶ 사실 저는 장애인용 구두가 어떤 건지 잘 모르겠어요. 예를 들어 소아마비이신 분이
라면 어떻게 제작이 되나요?
소아마비의 경우엔 뒤꿈치가 땅에 닿지 않아 다리가 가늘어지면서 아킬레스건이 짧아지
게 됩니다. 쓰지를 않아서 앞에만 닿고 뒤는 10㎝ 이상 떠있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바로 서 있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거기에 맞춰서 뒤꿈치가 안 닿던 분이 닿으면 얼마
나 편하겠어요.
또, 반대 발에만 힘을 주고 다니니까 무릎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게 되는데 아픈 발뿐만
이 아니라 반대 발, 다른 발도 잘 봐야 해요. 높이를 잘 맞춰서 서 있을 때 아픈 다리
가 똑바로 11자가 되도록 높이를 맞춰주면 되거든요.
▶ 그냥 잘 걸어 다니는 사람들도 구두를 잘 못 신으면 아파서 꼼짝도 못하는데 정말
그분들은 과학적이고 세밀하지 않으면 안 되겠어요.
앞에만 딛고 다니는 분들은 족관절이라고 해서 복사뼈에 있는 관절이 바깥으로 넘어가
거든요. 그것도 보완을 하고 석고를 떠서 딱 맞춰서 만들어야 하죠.
▶ 장애인용 구두를 제작하신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일반적으로 모양 좋은 구두만 만들다가 의수를 만들러 가서 장애인용 구두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시행착오도 많이 했고 일주일에 2,3개 만들면서 12년이
흘렀네요.
▶ 그 12년 동안 기억에 남는 분들도 많을 것 같아요.
양쪽 다리가 짧아서 휠체어를 타셨던 분의 구두를 만들어 드렸는데 6개월이 지나서 연
락이 왔어요. 그런데 여름 구두를 만들어 달라고 하면서 휠체어 없이 걸어 나오는 거예
요.
그분이 재작년에 천사 같은 남편을 만나서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았어요. 얼마나 기쁜
지 모르겠어요.
한 손님은 시집을 가려고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야 하는데 양쪽 발이 없었어요.
저도 너무 고민스럽더라고요. 장애를 가진 부모는 얼마나 더 힘들겠어요. 없는 발을 조
각하다시피 만들어서 그 위에 양말을 신고 신발을 만들었는데 전혀 불편한 티가 나지
않았어요. 그 어머님은 신발 어떻게 됐나 사흘 간격으로 저한테 전화를 하는데 정말 몸
살을 앓았죠.
지금은 결혼해서 잘살고 있습니다.
2년 전에는 젊은 아기엄마가 발목이 전주만 하고 반대쪽은 7㎝가 짧은 상태로 왔더라고
요. 정말 내 자식 같아서 실내화를 해서 보내고 여름에는 얼마나 더울까 싶어서 여름
신발도 해서 보냈더니 손님 어머님이 구두 만들어주는 사람이 어떻게 생겼길래 이렇게
내 딸에게 잘해주는지 감사인사를 하러오셨어요. (웃음)
◇ 장애아이보다 하루만 더 사는 것이 엄마의 소원
▶ 그런 분들은 선천적인 장애인가요?
선천적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지혈이 안 돼서 수술도 못해요.
▶ 그렇게 해서 만든 아름다운 인연들이 참 많겠어요.
옛날에는 몸만 불편한 분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요즘은 정신지체나 뇌성마비 자녀를 둔
어머님이 오시면 정말 답답해하세요. 그러면 인생 상담이랄까 아버지의 입장에서 이야
기 하게 되지요. 100이면 100, 어머님들이 그 아이보다 하루만 더 사시는 게 소원이라
고 하세요.
엄마의 힘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혼자서 시중을 다하고 자기 몸의 두 배가
되는 자식도 거뜬히 업어요. 40킬로그램의 어머니가 80킬로그램의 자식을 번쩍 번쩍 안
고 업고 그럽니다. 그게 다 어머니의 위대한 힘이에요.
▶ 신발을 맞추고 얼마 되지 않아서 돌아가신 분도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 분도 계시고, 신발을 맞춰놓고 그 사이에 돌아가신 분도 계세요. 예순넷, 다섯 되
신 남자 분이었는데 돈을 떠나서 잘 신고 가시라고 삼우제에 망인의 물건을 태울 때 그
냥 보내드렸어요. 만들면서도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 남궁정부 사장님처럼 장애인용 구두를 제작하는 곳이 또 있나요?
여기저기 있다고 하는데 잘 만들어줘야 해요. 장애인용 구두가 그전까지는 건강보험이
안됐는데 지금은 건강보험 적용이 되고 있어요. 그것을 위해 제가 서명운동도 벌이고
그랬는데... 그러다보니 무자격자들이 의료보험 수가만 받겠다고 발만 재서 공짜로 만
들어주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 한 켤레를 맞추는데 보통 비용이 얼마나 드나요?
발바닥을 성형하게 되면 35만 원을 받고, 소아마비처럼 다리기형이 되게 되면 40만 원
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건강보험에서 22만 원이 책정이 돼서 80%를 주니까 17만 6
천 원은 환급이 되지요.
◇ 주인을 잃어버린 망자의 구두에 가슴 아파
▶ 12년 전에는 일반 구두를 제작하셨고, 사고 이후에는 장애인용 구두를 제작하시게
되셨는데 그때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저는 일본에서 태어나서 해방 후에 김포로 와서 살았어요. 그러다 12살인 1953년부터
구두 만드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퇴계로의 세창이라는 양화점에서 7년간 심부름
도 하면서 수공으로 구두 제작하는 기술을 배웠어요. 그 뒤로는 가내 수공업을 비롯해
서 기술자로 일을 했지요.
사고가 95년에 났고 제가 56살이었는데 새로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공장이어서 준비
가 잘 안 돼 있었기 때문에 하도 답답해서 제가 직접 자료도 찾아오고 재료도 주문을
하고 그랬어요. 그날은 비도 추적추적 내렸고 술한잔도 걸친데다가 전철을 타고 왕십
리에서 5호선을 갈아타야하는데 2호선을 타고 잠이 들어서 신도림까지 갔어요.
그 역에 사람들이 엄청 많았는데 거기까지만 기억나고 나머지는 기억을 못 하겠어요.
아마 사람에 밀려 밑으로 선로 밑으로 떨어진 것 같은데 그 위로 지하철이 지나간 거
죠.
잠깐 의식이 있어 팔을 보니 손목은 없어지고 팔꿈치 위로는 가루가 됐더라고요. 아픈
것도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 보상도 못 받으셨겠네요?
철길이라 보상도 못 받고 보험도 없었어요. 결국, 10일 만에 퇴원을 했지요.
▶ 상처도 다 아물지 않았을 텐데 왜 그렇게 빨리 퇴원을 하셨어요?
잘라진 상태에서 더 이상 실질적으로 치료받을 게 없잖아요. 그리고 휠체어를 타고 장
기 입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어요.
뭘 해야 하나 고민하다 의수를 제작하러 갔는데 장애인용 신발을 그곳에서 보게 되었
고 담당자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 손이 하나 없는데 어떻게 구두를 만드셨는지... 더구나 오른손이잖아요. 혼자 밥 먹
고 옷 입는 것도 어려우셨을 텐데요.
배운 건데 남이 한 시간할 것 두세 시간이면 하지 않겠나 싶었어요. 그때부터 엎드려
서 왼손으로 ‘ㄱ’, ‘ㄴ’ 부터 다시 배우기 시작했죠.
▶ 가족이 어떻게 되세요?
집사람과 아들 셋이 있습니다. 사고 당시 큰아들은 결혼을 했었고, 둘째는 공군사관학
교 교육받을 때고, 셋째는 자기 장사한다고 그럴 때였어요. 그나마 다 키워나서 다행이
었죠.
◇ 한쪽 팔을 잃었다고 세상을 잃은 것은 아니다!
▶ 어느 정도 지나서 왼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으셨나요?
3개월 만에 가능했어요. 그리고 병원에 입원해서도 3일 만에 면도기 사오라고 해서 면
도도 하고 그랬어요.
▶ 그 절망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그 의지력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주변에 장애인 친구들에게 늘 말해요. ‘네가 앉아서 사회에 나오지 않으면 네 몸만 망
가지고 가정은 파탄되고 아무것도 안 된다. 처음부터 동정을 받고 자존심이 상해서 마
음이 상하게 되면 주저앉게 되니까 그걸 받기 전에 털고 나와서 남들이 붕어빵 장사하
면 너는 호박 장사라도 하면서 밖에 나와야 한다... 밖에 나와서 보지도 않고, 울타리
속에서 나오지도 않고 자식이나 들볶고 부인이나 들볶으면 안 된다... ’
보상금만 믿고 우물쭈물하다 보면 좋은 시간들 다 지나가 버리거든요.
또,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통증이 심하니까 그걸 잊으려면 뭔가 일이 필요해요.
▶ 통증이 심하셨어요?
지금도 통증이 심합니다. 송곳으로 찌르면 눈물이 확 날 정도예요.
▶ 진통제는 안 드세요?
안 먹습니다. 한 알을 먹기 시작하면 고단위로 먹게 되고 심지어는 마약까지 하게 되
는 손님들도 봤어요.
▶ 없는 팔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시고 그런 건가요?
없는 부분이 그렇게 아픈 거예요. ‘환상 병’, ‘유령 병’이라고 그러죠. 아직도
아파요.
그런데 뭔가에 몰두를 하게 되면 잊을 수가 있죠. 저는 일복을 타고난 것 같아요.
일을 하게 되면 그곳에만 집중하게 되죠.
▶ 의수를 안 하셨네요? 의수를 왜 안 하셨어요?
환부가 짧아서 온몸을 묶어야 하는데 제가 장애를 가졌지만 남들에게 굳이 잘 보일 필
요 없고, 일단은 제가 편해야 하니까요.
◇ 송곳으로 찌르는 듯 한 아픔도 일에 대한 몰두가 약
▶ 보니까 손이 정말 작으세요. 꼭 여자 손 같으세요. 이 손 하나로 구두를 5만 켤레
나 만드셨다는 것이 상상이 가지 않아요. 하루에 구두를 몇 켤레나 만드세요?
저희 직원이 15명 정도 되는데 만들기가 어렵다 보니까 하루에 신발이 10켤레가 안 나
오고 주문도 10개가 안 되고 그럽니다.
▶ 처음부터 장애인 구두를 제작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을 텐데 어떻게 만드셨는지 과정
이 궁금합니다.
장애를 가지신 분들은 발바닥이 안 좋아요. 굳은살이 크거나 옆으로 넘어가거나 그래
요.
깔창과 구두공정은 분야가 다른데 깔창을 만들기 위해 한 손으로 석고와 접착제를 칠하
다 보면 금세 굳어지고, 모터에 갈아서 한 겹만 붙이는 것이 아니라 높이에 따라 여러
겹 해야 하기 때문에 각도도 틀려요. 칼질은 한두 번이면 되지만 붙여서 사포에 갈아야
하고...
▶ 위험한 경우도 있겠어요?
상처도 좀 나고 모터의 회전속도가 빠르다 보니 흠집도 나죠. 처음에는 접착제도 많이
범벅되고 그랬어요.
▶ 가족들이 많이 도와주셨나요?
가족들은 저보고 하지 말라고 했죠. 그 당시 책 대여점이 유행이어서 그런 거나하지 그
러냐고요.
▶ 자본은 있으셨나요?
큰돈은 아니더라도 몇 십 년 거래한 재료상이라 외상을 좀 하려고 했는데 대답이 시원
치 않아서 크게 시작하지는 못했어요. 처음에는 주문에 맞게 재료를 딱 그 분량만큼만
사서 들고 다녔죠.
▶ 지금은 돈을 좀 버셨나요? (웃음)
지금은 재료상에서 우리 가게에 있으나 거기 있으나 똑같으니까 갔다 쓰라고 그러죠.
그것만 해도 많이 번거죠. (웃음)
◇ 독립은 장애인에 대한 정책의 첫걸음
▶ 해외에서도 인기가 있나요?
2000년에 미국에서 전시를 했는데 미국에서는 기존 신발에 높이만 조절하더라고요.
명함만 100여 개를 받아오고 재료고 뭐고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는데 주문만 12개를
받아서 왔어요.
LA 쪽에서 지점을 내면 어떻겠냐고 교포분이 권유를 해서 몇 번 다녀오기도 했는데 인
력이 부족해서 엄두가 않나요. 그만큼 기술자들이 없으니까요.
▶ 다른 나라는 어디에서 주문이 들어오나요?
주문이 오면 일본, 중국, 호주, 네덜란드.. 반응이 좋아서 계속 주문이 들어옵니다.
▶ 앞으로의 계획이나 꿈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저희 집에 오시는 손님들이 지방에서 오시다 보면 가족이 다 오시거든요. 그러면 시간
과 경비가 정말 많이 들어요. 각 도에 지점을 두고 AS만 해도 좋겠는데 이 기술을 장애
를 가진 친구들이 많이 배웠으면 좋겠어요. 저희 가게에도 칠순이 넘은 분이 있는데 기
술이 있고 일을 하시니까 건강하시거든요.
그런데 장애인은 거의가 영세민인데 저희 집에 취직을 하게 되면 영세민 자격에서 제외
되어 임대 아파트도 내놓아야 하고 장애수당도 못 받고 그럽니다.
공무원처럼 호봉이 있는 게 아니라 기술을 습득해야 봉급이 올라가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렵잖아요. 어느 정도 독립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국가적인 지원이 필요한데.....
그게 어려워요.
또, 지방에서 올라오면 숙식을 위한 기숙사가 절실합니다. 기숙사를 제공해주면 고용창
출 효과도 있을 텐데 정책반영을 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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